[데샹바레] 브룬펠시아_당신은 나의 것. By_LU
정신이 몽롱했다. 아득히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며 어딘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이 이질감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위화감과 동시에 기시감이 드는 기묘한 느낌.
“깼어?”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보인 것은 소파에 기대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까미유였다. 자신을 바라봐오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눈동자에 왠지 평소와는 다른 이채가 서린 것 같았다. 착각인가? 몸을 일으키자 아까부터 몸 전체에서 도사리던 이질감이 같이 도드라지게 일어섰다.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잔 뒤 몸을 움직여보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마치 남의 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분명 내 몸이지만 참 낯선, 어색한 느낌. 그래, 마치 새로운 몸인 것 같은……. 더욱 이상한 부분은, 내가 이 ‘이질감’을 느껴본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
……매번?
히카르도는 인상을 찡그리다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의아한 점을 생각해냈다.
“내가…… 왜 네 집에 있는 거지?”
“기억 안 나?”
까미유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기묘한 웃음이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히카르도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금 기억해보려 애썼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까미유의 집에 왔는지, 왜 여기서 자고 가게 되었는지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지만 그럴수록 마치 어제가 아닌, 오래 전 기억을 더듬는 기분이었다. 기억에 아득한 공백이 느껴졌다. 혹시 술에 취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자신은 그렇게 과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필름이 끊기는 경우라면 그런 경우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기억이 나질 않는군.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정신이 이상하게 몽롱해, 우린 어제 술을 마셨었던 건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자 까미유가 몸을 일으켜 히카르도에게 다가왔다. 의아한 눈길로 올려다보자 올려다보는 자신의 눈을 까미유가 빤히 들여다봐왔다. 그 눈빛, 히카르도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이었다.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는데, 까미유의 창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히카르도는 항상, 자신은 도저히 까미유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막연히 느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러나 이번에 히카르도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똑같았지만, 아까도 느꼈듯이 오늘 까미유의 눈빛은 뭔가 달랐다. 아니 그런 느낌을 받게 된 것은 오늘 뿐 아니라 좀 예전부터 바뀐 것 같았다.
……예전부터라고? 언제부터?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잠재워둔 무의식이 수면 깊숙한 아래에서 들썩거리는 듯 했다. 수면 아래 무의식이 외쳤다.
저 눈빛 본 적 있어. ―――할 때마다 봤잖아.
갑자기 눈가에 고통의 기억이 밀려왔다. 자기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미간에 문득 눈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온 몸을 감싸는 위화감이 눈에서도 강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는데 까미유가 잡아챘다.
“비비지 마. 눈에 안 좋아.”
“……?”
차분하지만 강압적인 목소리 때문일까, 날뛰던 무의식이 잠잠해졌다. 히카르도는 순간 몸에서 느껴지던 모든 이질감, 위화감 따위들이 숨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몸은 좀 어때? 몸이 좀 이상하지?”
“어? 어……, 그렇더군."
“자세히 진찰을 해봐야 알겠지만 단순한 숙취는 아닌 것 같으니 한동안 쉬도록 해.”
“하지만…….”
“카모라에는 내가 말해두지. 넌 쉬어야 돼. 의사로서의 충고야.”
반박의 여지를 없애버린 까미유의 단언에 히카르도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는 열을 재는 듯 하더니 동시에 그대로 자신을 밀어 눕혔다.
“그럼, 누워 있어. 마실 물이라도 가져올 테니.”
“…….”
시원하군. 이미 까미유는 멀어졌지만, 아직 이마에 남아있는 손의 서늘한 여운을 멍하니 음미하다가 히카르도는 그제서야 자신이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역시 까미유는 의사군. 내가 몸이 이상하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다니. 히카르도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의사라서…….
누운 채로 히카르도는 생각의 화제를 돌리듯 시선을 돌려 다시금 방안을 둘러보았다. 별 생각 없이 둘러보는데 문득 익숙한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꽃’이었다. 색깔이 다르긴 했지만, 까미유의 부탁으로 자신이 사다 줬던 꽃.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질적인 동질감이라, 어쩐지 우스웠다.
자스민, 이었던가. 까미유가 아니라고 정정해준 것 같기도 했다. 정정해준 이름이 뭐였지, 브룬…….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 정정해줬던 거지? 히카르도는 눈을 깜박였다. 이질적인 감각. 위화감. 자신이 살 때는 보라색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하얀색이었다. 어째서……하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생각을 전에도 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 꽃이 하얀색인 것은 처음 보는 것일 텐데도 예전에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언제?
문득, 눈을 뜰 때 들었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니,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음악소리였다. 째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마음을 긁었다. 왠지 들어본 것 같았다. 잊고 있던, 아니 억눌러놨던 기시감이 자신을 잠식해오는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장면들, 그래, 아마 이 다음엔 까미유가…….히카르도는 고개를 들었다. 까미유가 컵을 가지고 방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한이 느껴졌다. 무의식이 다시금 사납게 꿈틀거렸다. 자신을 덮쳐오는 기시감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까미유에게 물었다.
“까미유, 저 꽃은?”
“아아, 저 꽃.”
히카르도에게 컵을 건네며 까미유가 무심히 대답했다.
“네가 사온 꽃 맞아. 너는 자스민인 줄 알고 사왔지만 사실 브룬펠시아야. 보라색에서 하얀색으로 바뀌더라고. 신기하지 않아? 하얀색에서 보라색이 아니라, 보라색에서 하얀색으로 바뀌다니.”
왜일까, 점점 선명해지는 기시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떨림과 함께 무의식이 몸을 장악해왔다. 히카르도는 그것을 억제하려 애쓰며 물을 들이키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꽃의, 바뀌기 전의 색과 비슷한 색이었다. 내 손이 원래 이런 색이었던가?
“나는 이렇게 색깔이 바뀌는 모습이 좋더라.”
무의식의 소리일까, 몸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볼 때마다 매번 새로워.”
히카르도는 저도 모르게 까미유를 퍼뜩 올려다보았다. 저 말, 왠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아마 꿈속에서, 그래, 꿈속에서, 질리지도 않아? 하는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아직은 전혀. 볼 때마다 매번 새로워.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꽃을 바라보던 까미유가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빙긋, 까미유가 웃으며 물었다.
“너는 어때?”
아직도 네 몸이 매번 낯설어?
§
까미유가 원했던 것은 자스민이었다.
그러나 히카르도가 사온 것은 브룬펠시아였다. 향이 좋아 브룬펠시아 자스민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이었지만, 자스민이 아니었다. 까미유는 그 사실을 히카르도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 멍청한 꽃집 주인의 잘못이었지. 꽃집을 하면서 어떤 꽃인지도 구분을 못하다니. 까미유는 그런 부류의 인간을 혐오했다.
평소였다면 히카르도를 시켜서 다시 바꿔오도록 했겠지만 사실 이제 자스민 같은 것은 필요 없어졌기에 까미유는 그냥 두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히카르도에게 자스민을 사오라고 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그가 이 꽃을 사왔을 때, 까미유는 이 마피아 남자가 이제 꽃을 키우는 취미도 기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흠, 뭐 생각해보면 그리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됐든 간에 이 꽃은 까미유에게 필요하지가 않았다. 가지고 있는다고 피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이용가치가 없는 것을 계속 가지고 있자니 눈에 거슬렸다. 어차피 자신은 돌보지 않을 테니 시들어 갈 테고, 시든 꽃을 보는 것은 더욱 취미에 없었다. 히카르도에게 가져가라고 할까.
까미유는 자신의 집의 창가자리를 차지하게 된 브룬펠시아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잎사귀들 사이에는 아직 개화되지 않은 동그란 보라색 꽃망울들이 달려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 없이 하나를 따서 손가락으로 굴려보았다. 채 꽃잎을 피우지 못한 꽃망울이 부드럽게 손가락에 감겼다. 꽃망울을 굴리며 그는 무심코 그,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너의 눈동자도 이렇게 부드러울까.
그 생각의 흐름은, 말하자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의식적인 연상 작용이었다. 그리고 까미유는 딱히 그 생각의 흐름을 막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까미유는 무의식적으로 꽃망울을 굴리는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꽃망울이 서서히 짓이겨졌다. 너의 눈동자도 이렇게 부드럽게 짓이겨질까. 짓이겨지는 꽃봉오리에서 새어나오는 보라색 물기가 손을 옅게 물들였다.
짓이겨지며 이렇게 나를 물들일까,
너의 눈동자도.
*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저 혼자 큰 건지 어느새 보라색 꽃망울은 이제 꽃망울을 터트려 제 꽃잎을 드러냈다. 꽃망울이 터지자 이제 정말 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보라색 속살과 함께 짙은 향기가 피어났다. 화분의 흙이 꽤나 축축했다. 비가 왔었던가. 기억에 없다. 아마 히카르도가 돌봤을지도 모른다. 히카르도에겐 연구 재료라고 말해뒀으니 혹여 개화 전에 저버리면 연구 재료로 쓰일 수 없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돌봐줬겠지. 아니 어쩌면 그런 게 아닐지라도 그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따금씩 물을 한 번씩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자상하니까.
까미유는 문득 자신의 입가에 조소가 걸리는 걸 느꼈다. 퍽 우스웠다. 꽃에 물을 주는 마피아와 꽃을 꺾는 의사라……. 까미유는 자신이 동그랗게 말려있던 꽃망울을 따서 굴리던 것을 상기하며, 문득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꽃으로 비유했던 것을 떠올렸다. 꽃을 좋아하면 꽃을 꺾고, 사랑하면 꽃에 물을 준다고…….
나는, 좋아하는 건가?
사실 그간 까미유에게 꽃은 별다른 감흥을 안겨주지 못했다. 별다른 이용가치가 없었으니까. 꽃의 아름다움은 까미유를 움직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꺾고 싶지도, 돌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꽃은, 이 보라색 꽃은, 개화 전이라 그리 예쁘지도 않던 꽃망울 때부터 어딘가 그를 자극했다.
꺾고 싶었다.
짓이기고 싶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아니, 까미유는 생각을 정정했다. 이건 무슨 욕구일까.
*
그렇게 그 꽃은 까미유의 집에서 머물렀다. 별 이용가치가 없었지만 까미유는 그 꽃을 그냥 두었다. 색깔 때문이었을까. 까미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탄야가 찾아왔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집에, 탄야는 그 꽃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꽃, 뭔지 알아?
꽃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대충 이름만, 브룬펠시아 아닌가?
그녀가 짙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 꽃에는 독성이 있어 꽤나 위험한 꽃이었다. 짙은 향기는 사람을 매혹시켰지만 그 향에 계속 취해있노라면 안면마비가 올 수도 있었으며 자스민처럼 차로 우려먹는다면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흠.
이용가치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하나 더, 그녀가 떠나기 전에 덧붙였다. 그 꽃, 보라색에서 하얀색으로 바뀌어.
그리고 까미유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
꽃의 이용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데샹! 급한 환자야!!! 현 의료기술로는 아무런 차도가 보이지 않아. 자네가 와서 봐줘야 해.”
동료 의사 에릭의 급한 호출에 까미유는 먼저 뛰어가는 에릭을 따라 달렸다.
“아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병실로 달려가던 중 고통에 찬 비명이 먼저 그들을 맞이했다. 긴 복도가 비명으로 가득 점철되었다. 속도를 높여 다다른 병실 문을 열었다. 괴로움이 형상화된 것만 같은 움직임으로 침대 위에 환자가 한껏 버르작거렸다. 의사로서, 까미유로서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까미유는 빠르지만 침착하게 다가가 반딧불이들을 통해 회복을 시도했다. 아니,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이, 그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환자에게 향하던 반딧불이들이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그는 환자의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와 닮았다. ‘그’와 닮은 얼굴이 괴로움에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표정, 견딜 수 없으나 고통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견디고’ 있는 표정, 그 처절한 표정들, 그리고 마침내 스러져, 고통의 희미한 자욱만을 남긴 이완된 얼굴.
죽어가는 표정.
그 순간 까미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샹! ―만―! 환―는 ―――죽――!”
그 소리가 자신의 귀를 가득 채웠다. 아니 몸 전체를 차지했다. 혈액이 온 몸을 순환함에 따라, 심장의 박동이 온 몸을 훑으며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소리와 동반된 한 가지 생각.
‘그’는 죽어갈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데샹, 됐네! 그만해! 환자는 이미 죽었어!”
자신을 붙드는 손길에 문득 까미유는 정신을 차렸다. 까미유는 능력을 멈추고 멍하니 죽은 환자를 응시하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들어 올리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괴로움과 슬픔에 찬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비춰졌다.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괜찮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글쎄.
그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맞았지만, 사실, 최선을 다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환자에게 능력을 쓰지 않았으므로. 또한, 까미유가 얼굴을 가린 것과도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웃고 있었으므로.
이제까지 자신을 만나 치료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까미유가 능력을 썼음에도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까미유에게 오명이 될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것은 까미유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 표정만이 가득했다. 죽어가는 표정. 왜였을까. 의사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물론 까미유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
그의 그 표정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표정을 ‘또’ 볼 수 없잖아. 또 다른 표정들 역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그 직전까지만 가게 할까? 하지만 그러면 진정한 ‘그’ 표정을 볼 수 없잖아.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시 살려내면 되잖아?
*
그동안 계속 바빠 만나지 못했던 히카르도를 찾아갔다. 기뻐하는 눈치의 히카르도에게 일주일치 약을 내밀며 식사 때마다 챙겨먹으라고 했다. 뭐냐고 묻는 말에 그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를 위한 거야.”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지.
*
어느새 꽃은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탄야 말대로였다. 까미유는 흰색으로 변한 꽃 중 하나를 똑 꺾어들었다. 네가 사온, 네 눈동자를 연상시키던, 그러나 지금은 하얗게 물든.
하얀색으로 물든다니, 까미유는 무심코 나머지 손으로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참 흥미로운 점이었다. 동시에 까미유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점이었다.
너도 이제 이렇게 될 수 있어…….
까미유는 작게 속삭이며 꽃을 그러쥐었다. 하얀 꽃잎이 힘없이 구겨졌다.
*
모든 준비가 끝났다. 까미유는 히카르도에게 임상 시험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약품은 완성됐는데 임상시험을 해볼 수가 없어 굉장히 난처하다는 기색을 비추자 히카르도는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의도대로였다.
히카르도는 침대에 얌전하게 누워있었다.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그를 보며 주사를 놓기 직전 문득 까미유가 말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사실, 자기도 모르게 뜬금없이 나간 말이었다. 까미유는 담담하게 놀랐다. 왜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의 두려운 표정을 보고 싶은 건가? 아니, 그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자신을 안심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인가, 그라면 그런 말을 듣고도 응해줄 거라는 믿음?
믿음?
그 단어를 생각한 까미유는 실소를 뱉었다. 믿음이라니, 그런 관념적이고도 추상적이며 믿을 수 없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감정을.
그러나, 그는, 히카르도 바레타는 그것을 매우 쉽게 사용했다.
“괜찮다, 까미유. 너는 의사잖나.”
예상대로, 그는 오히려 까미유를 안심시키듯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까미유는 잠시 그를 오묘한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그는 항상 예상 밖이면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예상대로였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이리도 쉽게 믿는가……. 내 의도를 알면서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는 모르잖아. ‘죽을 수도 있어’라는 말이 사실은 ‘너를 죽일 거야’라는 의미란 것을. 그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다 문득 자문했다. 그는 정말로 모르는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예상치 못한 가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아무런 근거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유력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더욱더 혼란스러워진다. 무엇을 근거로 믿는 거지.
“내가 잘못돼도 너는 날 치료해줄 수 있지 않나. 난 너를 믿는다.”
그렇지? 하고 묻는 듯한 얼굴에 까미유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까미유는 느리게 주사기의 피스톤을 눌렀다. 히카르도가 눈을 감았다. 약간 긴장한 듯도 보였지만 더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믿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겠지.
믿기 때문에……, 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나를 믿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인가. 진정한 믿음은 후자라고들 하던가.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금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 믿음,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믿는다는 것(trust)은 까미유에게 이해 불가한 영역이었다. 단지 히카르도를 보며, 믿음이란 저런 거로군,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겉으로 따라할 수는 있겠지만 까미유의 세계는 믿음이란 관념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그것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영역, 자신이 느낄 수 없는 영역. 하지만,
까미유는 고통으로 서서히 일그러지는 히카르도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내가 느낄 수 있는 영역이지.
히카르도가 괴로운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감은 눈을 더욱 질끈 감아 눈 주위로 수많은 금이 갔다. 몸을 한껏 뒤틀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억눌린 신음이 꽉 다문 잇새로 새어나왔다. 비명을 질러도 좋을 텐데. 아니, 하긴, 나는 그 표정을 더 좋아하긴 했다. 너의 그 참고 있는 표정이 나를 더욱 참을 수 없게 했다.
까미유는 그 때, 죽어가는 환자를 보던 때 느꼈던 그 감각이 다시금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더욱 더 강렬했다. 전율이 등골을 훑고 올라갔고 동시에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명치 아래로 내달려 배를 가로질렀다. 심장소리가 온 몸의 맥박에서 침착하면서도 격렬하게 뛰어댔다. 히카르도의 몸에 죽음이 퍼지고 있듯이 까미유의 몸에 희열이 번졌다.
까미유는 히카르도에게 작게 속삭였다.
“리키, 눈을 떠 봐.”
고통 속에서 정신이 없을 그가 어떻게 들은 건지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리면서도 힘겹게 눈을 떴다. 일그러진 얼굴 속 동공이 풀린 눈동자가 까미유를 올려다봐왔다. 까미유는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그래, 이 느낌. 그리고 미소. 이걸 보고 싶었어.
너의 황홀한 고통. 그 고통에 물드는
너의 보라색 눈동자.
너의 찬란한, 일그러진 얼굴.
너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녹 슬어가던 심장에 생기가 돌았다. 마치 생명의 맞교환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생명을 자신의 심장으로 전이시키는 느낌. 그리고 그렇게 그의 생명을 소유하게 된 자신이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자신이, 그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생명에 대한 권한이 까미유에게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점이, 더욱 까미유를 희열케 했다. 그래, 그의 생명의 권한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는 자신에 의해 죽고 또 자신에 의해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생명의 순환과 재배열.
그래, 나는 너의 생명을 재배열할 것이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그렇게 하므로 너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완벽하게.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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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바레 꽃합작, 브룬펠시아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브룬펠시아... 꽃말도 그렇지만 보라색(히까!!)에서 흰색(깜유!!)으로 변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서 꽃 합작이라길래 바로 생각나서 신청해버렸네요. 그리고 향이 좋은데 독성이 강해서 오래 맡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점도 까미유를 연상시켜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험한 너...
(이런 훌륭한 꽃으로 이런 망작을..)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소재지만 합작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존잘님들이 많아 편하게 묻혀갈 수 있어서 너무 좋은...ㅠㅠ
미친 길이 죄송합니다.....거의 10000자 되더군요.
여담으로 D.C는 다카포입니다(처음으로 돌아감)
혹시라도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 있으시다면 읽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